조선시대12. 조선의 사회경제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4:53:04    조회: 465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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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_arow_06.gif 신분제도 
16세기말∼17세기초의 왜란과 호란(량란)은 조선후기의 사회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분제도의 변화는 주목할만한 일이였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량반, 중인, 상민, 노비의 4신분제로 유지되였으나 량란을 맞으면서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였다. 신분제도변화의 근본원인은 신분의 상승작용이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중에서 노비는 적의 목을 하나만 베어도 노비 신분에서 해방될수 있었다. 한편 돈을 내고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법적으로 보장되였고 그 비용도 점차 싸져서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였다. 또한 전쟁과 같은 혼란 중에는 노비들이 도망을 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도망을 가서 붙잡히지 않으면 상민이 될수 있고 붙잡힌다 해도 노비일뿐이니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상민, 중인은 량반신분으로 상승하여 갔다. 조선 정부는 량란으로 부족해진 국가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돈을 받고 관직을 팔곤 하였다. 군역의 부담으로 고생하던 상민들은 이 같은 국가의 매관매직(賣官賣職, 관직을 사고 팖)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신분상승을 꾀했다. 

상민의 수가 크게 감소하자 군역을 담당할 장정의 수도 크게 줄어들었는데 이 상민층이 국가의 조세기반이였다. 조세기반의 감소는 다시 국가 재정의 감소를 가져오는 악순환이 계속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궁여지책으로 노비를 해방시켜서 상민층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1801년 순조 때는 무려 6만 여명의 공노비가 해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정부의 미봉책도 신분제도의 붕괴를 부채질했다. 

조선후기 신분의 상승작용으로 10%에 불과하던 량반의 수가 19세기 중엽 철종 대에는 무려 70%로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모두가 량반이 된다면 량반은 이미 특권층일수 없다. 따라서 량반 숫자의 증가로 량반의 지위는 크게 떨어졌다. 

조선후기 신분제도의 붕괴는 중세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를 준비하는 중요한 징표로 된다. 

b_arow_06.gif 농업의 발전 
chaoxian12-1.jpg조선시기 농업의 발전은 이앙법과 견종법의 발전에서 볼수있다. 

이앙법은 모판에 모를 심어 자라게 한 후 5, 6월쯤에 제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다. 옮겨 심는 과정을 우리 말로 "모내기"라 하기때문에 이앙법을 모내기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앙법을 쓰면 가을에 벼를 수확한 그 땅위에 보리를 심을수 있어서 말 그대로 이모작을 할수 있다. 1년에 두번 수확하고 공은 덜 들이고 리익이 많아 조선후기에는 전국에서 행해지게 되였다.

견종법은 밭고랑에 작물을 심는 방법이다. 견종법은 작물이 수분을 쉽게 확보하여 가뭄에 잘 견딜수 있을뿐만아니라 유기질의 침전물을 손쉽게 거름으로 흡수할수 있고 또 김매기가 편리하여 로동력이 절약된다. 로력은 절반 들고 수익은 곱절이나 많다고 한다. 

이앙법과 견종법의 보급으로 한사람이 보다 넓은 땅을 경작할수 있게 되자 소작할 땅을 얻는데 있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치열한 경쟁에속에서 많은 소작지를 확보한 일부 농민들은 부유한 농민으로 성장하여 갔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지조차 얻지 못하게 되여 농촌을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가서 자신의 품을 팔아 생활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신세가 되거나 도적떼가 되기도 하였다. 

농업기술의 발전은 생산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궁극에는 농민층을 분해시키고 평온했던 농촌사회를 흔드는 결과가 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농업기술의 발전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에 그치는것은 아니라 사회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아울러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였음을 알수 있다. 

b_arow_06.gif 상품경제의 발전 
chaoxian12-2.jpg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농민층의 분해로 절대다수의 농민층은 가난한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반면에 새로이 성장한 "서민지주" 또는 "경영형 부농" 등 부농층은 토지를 집적 해가면서 경영규모를 확대하였고 부족한 로동력은 빈민을 임로동자로 고용하여 시장판매를 목적으로 작물을 재배하였다. 

이처럼 자급자족적인 종래의 농업은 점차 상업적 농업 즉 판매를 위한 농업 산으로 발전하였다. 농산물의 상품화, 즉 상업적 농업은 쌀을 비롯한 곡류, 목화, 담배, 인삼, 채소 등이 중심이였다. 

상업적농업의 발달은 농업기술의 발달을 더욱 촉진하고 면화 등 수공업 원료를 더 많이 생산함으로써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상업적농업은 소규모 자영농민의 소상품 생산을 촉진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을 위한 력사적전제를 마련하였다. 

농업생산이 전반적으로 증대함에 따라 수공업 생산도 급격히 증대되였다. 

고대사회로부터 무기를 비롯하여 관청에서 사용하던 물건이나 지배층의 생활용품을 만드는 수공업은 관청에서 직접 운영하였다. 그러나 량란이후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해이해져 관영수공업의 유지가 어려워지고 개인이 운영하는 민영수공업이 발전하게 되였다. 특히 조선후기 농민층 분화에 따른 도시 인구의 증가, 상업의 발달, 대동법 실시로 인한 관청 물건의 시장구입 등이 원인이 되여 민영수공업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수공업이 발달해지자 그 원료를 생산하는 광업도 함께 발달하였다. 조선전기의 광업은 농민을 부역으로 동원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수공업의 발달, 동전의 유통, 대외 무역의 발전 등으로 금, 은, 구리 등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전과 같은 관영광업으로는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였다. 농민들은 부역을 기피하고 정부는 재정부족으로 광산경영 경비의 마련이 어려웠기때문이다. 결국 민간경영에 의한 민영광업이 발달할수밖에 없었다. 

상품경제의 발전은 봉건적사회체제를 해체시키고 자본주의적관계를 발전시키는 결정적요인이 되였다. 즉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자자족적 자연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봉건적사회의 경제질서가 서서히 붕괴되고 그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적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싹이 돋아나고 있었던것이다. 또 봉건적 질서를 유지해온 신분제 및 사상과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새로운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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