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11. 세도정치와 홍경래의 란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4:52:04    조회: 876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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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_arow_06.gif 세도정치
chaoxian11-1.jpg안동 김씨는 한때 풍양 조씨의 도전을 받아 세도를 빼앗긴적이 있었다. 순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매년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유행하여 인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스스로 덕이 없음을 자책하면서 세자에게 양위를 하였다.(순조 27년, 1827년) 이때 조만영의 딸이 세자비가 됨으로써 이후 헌종때까지 15년간 풍양 조씨의 세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1849년) 다시 안동 김씨의 세도로 바뀌였다.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이 철종비가 되였기때문이다. 

안동 김씨는 자신들의 영구적인 집권을 위하여 왕손을 역적으로 몰아죽이곤 하였다. 철종은 강화 도령 이원범으로 조부때에 역적으로 몰려 몰락한 왕손이였다. 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안동 김씨의 속셈은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들이 멋대로 정치를 주무르기 위함이였다. 철종때에 이르러 안동 김씨세도는 절정에 달하였고 순조, 헌종, 철종 3대 60여년간의 세도정치로 조선정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졌다.

b_arow_06.gif 삼정의 문란
정치기강의 문란과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민중은 크게 고통을 겪었다. 당시의 국가재정기반은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이였다. 전정은 전세로서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였고 군정은 군포로서 군사비용을 충당하였으며 환곡은 빈민구제를 위한 량곡대여제도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중앙정치의 문란과 함께 부패한 지방관과 아전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이와같은 수취체제가 무너져갔다. 그들은 중간에서 세금을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워 치부하였다. 이에 따라 갈수록 국가재정이 부족해지고 다시 그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각종 명목의 부가세를 추가하고 뺏아가니 농민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b_arow_06.gif 홍경래의 란
세도정치하에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것은 삼정의 문란만이 아니였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는 흉년이 잦고 전염병이 만연하여 민심이 흉흉해져갔다. 이에 따라 류언비어나 도참설이 류행하게 되였는데 순조 4년(1804년) 4대문에 "정감록(鄭鑑錄)" 등이 나붙고 정부를 비방하는 괘서, 벽보가 사방에 나붙어 민심을 더욱 혼란하게 하였다. 세도정권하에서의 가혹한 착취가 민심의 반란을 일으켰고 순조 11년(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란이 터졌다. 

chaoxian11-2.jpg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다복동에서 대규모로 조직적인 반란을 주도하였다. 그는 몰락량반으로서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과 공모하여 지도층을 형성하고 영세농민, 광산촌민, 중소상인 등 3천여명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서북지방민에 대한 차별대우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세도정권에 항거하는 대규모의 민란을 일으켰다. 봉기군은 10여일만에 인근 7개 고을을 장악하고 농민의 호응을 받아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정부군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3개월동안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였다. 정주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요헌 등이 이끄는 조선정부군은 성밑으로 땅굴을 파고 폭약으로 성벽을 폭파하고 진입하였다. 마침내 홍경래는 전사하고 2천여명이 처형되여 4개월만에 홍경래란은 평정되였다. 
 

홍경래란은 그 발단이 서북지방민에 대한 차별대우에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당시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과 세도정권에 대한 반발의 성격이 강했던 민란이였다. 영세농민들과 다수의 광산로동자들이 합세했다는 점에서 당시 농민층 분화로 인한 농민들의 몰락을 엿볼수 있다. 또한 중소상인이 가담했다는 점에서 도고의 횡포로 인해 중소상인들이 몰락하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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