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10. 붕당정치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4:51:37    조회: 1,126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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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_arow_06.gif 붕당정치의 시작과 발전
chaoxian10-2.jpg붕당의 발단은 선조 8년(1575년)에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에서 비롯되였다. 이조전랑은 5품직으로 고위직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문무관원의 인사행정을 맡아보는 실무직이였다. 또한 이조전랑자리는 현임전랑이 후임을 추천하는 "자대법(自代法)"이 적용되였다. 이조전랑은 관리임용을 거부할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삼사(언론기관)의 언론을 주도하는 등 사림정치에서 핵심적위치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어느파에서 이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다. 

김효원이 이 전랑자리에 천거될 때 심의겸이 반대하였고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이 자리에 천거될 때는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렇게 두사람의 대립을 둘러싸고 최초로 붕당이 형성되였다. 신진관료인 김효원의 집에 출입하는자는 동인이라 하여 유성룡, 김성일 등 주로 퇴계문인의 영남학파가 이에 속해있었다. 반면 기성관료인 심의겸의 집에 모여든자를 서인이라 하여 윤두수, 정철 등 주로 율곡문인의 기호학파가 이에 속해있었다. 

당쟁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세력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동인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이후 남인(온건파)과 북인(강경파)으로 나뉘었다. 임진왜란직후 북인이 권력을 잡았으나 곧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나뉘어졌다. 광해군시대에는 그의 즉위를 지지한 대북이 정권을 독점했으나 대북은 또 다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나뉘어졌다. 북인은 명청교체기에 광해군을 도와 실리적인 중립외교정책을 펴나갔다. 그러나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서인의 인조반정(1623년)이 성공을 거두면서 대부분 역적으로 몰리고 이후 영영 권력의 밖으로 쫓겨났다. 

한편 남인은 호란이후 서인정권이 추구한 무리한 북벌운동을 비판하면서 "예송(禮訟)론쟁"(유교적 예절에 관한 론쟁)을 일으켜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이후의 붕당정치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정권은 서인과 남인사이를 오갔다.

신구정치세력의 대립, 복제문제를 둘러싼 정치세력사이의 분쟁, 왕비와 후궁쪽으로 나뉘어진 붕당간의 싸움 등으로 이어져온 붕당정치는 다시 왕과 그 형제, 혹은 왕과 왕자사이의 대립을 계기로 계속되였다. 숙종말년에는 소론이 경종을 두둔한 반면 노론은 그의 아우 영조를 지지하였다(숙종때 다시 집권한 서인은 곧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이 집권했고(1721년) 경종이 단명하여 영조가 즉위했을 때에는(1725년)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b_arow_06.gif 붕당정치의 영향
붕당정치를 통하여 정치가 활성화되였다. 국왕자신이 폭정을 하거나 세도정치기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민란이 빈발하였던데 비하면 견제와 비판으로 집권당의 실정을 방지하는 붕당정치는 오히려 환영할만한것이였다. 

그러나 붕당정치는 지배층의 관직쟁탈전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붕당정치가 일반화되면서 의리와 도덕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명분론과 허례에 빠져들었다. 또한 반대 당에 대한 포용성이 결핍되여 조선의 사회, 문화는 차츰 탄력성과 개방성을 잃어갔다. 올바른 인재등용의 길이 막히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돌보지 않음으로써 결국 국력이 약화되는 등 부정적결과를 가져왔다.

b_arow_06.gif 탕평책
숙종은 재위말년에 노론, 소론의 치렬한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한 탕평책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의 탕평책은 불완전했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이어지는 정치사건은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교체시키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그치고 말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 갑술환국이후에는 서인일색으로 정치세력이 불균형을 이루어 붕당정치의 파탄을 초래하였다. 즉 여러 붕당이 공존하면서 상대당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붕당의 원칙이 무너지고 말았던것이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단명으로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다)"의 본격적인 탕평책을 시행, 여러 당파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다. 영조는 당쟁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누구든 당파를 위하는 행동이나 발언을 하면 무조건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chaoxian10-1.jpg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분쟁은 계속되였으며 후에 시파와 벽파로 분렬되였는데 소론과 남인은 시파에 속하고 노론의 대부분은 벽파로 되였다. 

영조가 죽기전까지는 노론벽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시파가 정계를 장악하고 여기에 남인시파가 등용되여 오랜만에 남인세력이 등장하였다. 탕평책은 정조에 의해 계승되여 어느정도 인재의 고른 등용이 이루어져 붕당정치를 완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정조 역시 시파를 가까이 하였다.
 

영조, 정조시대의 탕평책은 유능한 국왕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붕당정치의 균형을 이룬데 불과하였다. 조선후기의 혼란한 정치상황은 왕권의 취약함에 그 근본원인이 있었다. 후에 순조가 즉위한후(1801년) 권력은 다시 노론벽파에게로 넘어갔다. 권력을 장악한 노론벽파는 남인시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신유사옥, 순조 1년, 1801년) 노론외척의 일당독재인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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