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4.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6-04-13 14:47:57    조회: 51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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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xian4.jpgb_arow_06.gif 세종대왕의 통치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왕권의 안정하에 유교적인 덕치와 민본정치를 지향하여 재위 32년동안에 많은 치적을 이루어냈다. 

학술과 언론을 중시하는 합리적 관료주의사회를 정착시켰으며 국학연구를 통한 민족문화의 정리 및 전분6등과 연분9등의 세법정비, 그리고 대외관계의 개선 및 4군6진의 개척 등을 통해 사회안정 및 국력의 신장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세종의 업적은 자신이 길러낸 집현전학사들의 도움에 크게 힘입었다. 특히 한글의 창제는 민족문화의 중흥에 일대 전기를 이루었으며 측우기 등 과학기기의 발명은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드높인것이였다. 

b_arow_06.gif 훈민정음 
한글은 우리말을 적는데 필요한 소리를 정밀하게 표기할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한글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한 정인지는 한글을 "바람소리와 학울음, 닭우는 소리와 개짖는 소리도 모두 적을수 있는" 문자라고 했다. 또한 소리를 내는 사람의 기관을 본따 문자의 모양이 만들어졌기때문에 이해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배우기도 대단히 쉬웠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만에 깨칠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수 있었던"것이 한글이였다. 

한글의 과학성은 세종과 집현전학자들의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나라의 문자에 비하여 뒤늦게 만들어졌다는데에서도 연유한다. 다른 나라의 문자들이 대부분 고대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반면 우리 나라의 한글은 중세에 이르러 필요에 의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만들어졌기때문이다. 따라서 자, 모음이 쉽게 구별될뿐만아니라 자음이 입술, 입, 혀의 위치를 확실하게 해주며 자, 모음이 수직, 수평의 조합을 통해 사각형을 이루면서 정연하게 배열된다. 이러한 점에서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한글의 창제, 반포에는 반대도 많았다. 세종 26년(1444년)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반발이 컸다. 한글이 제정(1443년)되고 그 반포(1446년)가 미루어진 리유도 여기에 있었다. 최만리는 새 문자를 만드는 일자체가 오랑캐의 짓이라고 반대하였다. 이는 유학과 한문학을 숭상하는 문화적사대주의의 소산이였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이를 활용하는데 힘을 썼다. 최초로 편찬된 한글서적은 "용비어천가"인데 125장의 악장체로 조선건국의 연원과 위업을 찬양하였다. 불경을 번역한 "석보상절"은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기위해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엮은것이였다. 이를 보고 감탄한 세종이 직접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이 두책을 하나로 합친것이 "월인석보"였다. "동국정운"은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한것이며 한자학습서인 "훈몽자회"도 한글로 편찬되였다.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삼강행실도"와 같은 책들이 한글로 편찬되기도 하였다. 

세조는 "간경도감(불경간행을 위한 임시기구)"을 설치하고 많은 불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한글은 부녀자들의 편지에 널리 쓰이기도 하였다. "암클"이라는 호칭도 이때문에 붙여진것이였다. 그외에도 농민이 보는 농서와 대외적 비밀유지가 필요한 병서 등이 한글로 씌여졌다. 

"훈민정음" 서문에 명기된바대로 한글은 백성들의 문자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창제되였다. 이는 세종의 애민정신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통치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간과할수 없다. 이같은 목적은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는 서리들에게 한글시험을 치르게 한데서 잘 나타난다. 또한 "삼강행실도"같은 책을 한글로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하고 그들을 유교적으로 교화함으로써 성리학적 통치체제를 안정시킬수 있었다. 이렇듯 창제초기에 한글은 "통치의 수단"으로서 크게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글을 쉽게 익히고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은 점차로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할수 있게 되였다. 이에 따라 한글의 역할은 "통치의 수단"에서 "저항의 무기"로 바뀌게 되였다. 허균의 "홍길동전"의 저술과 유포, 잦은 괘서, 벽서사건은 이의 반증이다. 연산군때 탐관오리의 횡포를 고발하는 벽서가 나붙자 한글책을 불사르고 한글의 사용을 금지시켰던 사건만 보더라도 한글이 서민의식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수 있다. 

오늘날 시점에서 한글창제의 의의는 말로 다 표현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토록 어렵다는 미, 적분에 대한 설명이 한문으로 되여있는것을 상상해보라. 문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산경험과 지식들을 축적하는 유력한 도구가 된다. 가장 과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우기 쉬운 한글은 지식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민족문화발달의 밑거름이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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