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10. 고구려 당나라와 싸우다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09-24 15:19:19    조회: 948회    댓글: 0

ls_title_hanshi_15.gif


sanguo10.jpg당 건국이후 처음에는 량국사이에 화해의 기운이 일었다. 당고조나 이때 즉위한 영류왕(재위 618~642) 모두 서로간의 긴장상태를 원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두나라는 수와의 전쟁중 생겼던 포로를 서로 교환하였고 당으로부터 고구려에 도교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의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다시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당태종은 국내정치가 안정되자 고구려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고구려에서도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료동지방에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경계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당과의 긴장관계가 격화되자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과의 화해를 기본으로 하는 북수남진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느낀이가 연개소문이였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642) 영류왕과 당에 대한 온건세력을 처단하고 당에 대한 강경로선을 선포하였다. 이런가운데 신라는 다시 당에 접근하고 있었다. 

량국사이의 대립이 날카로워진 가운데 644년에는 사신을 서로 감금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끝내 국교가 단절되고 말았다. 당태종은 임금을 죽인 연개소문을 단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당군의 목표는 료동성이였다. 료동성은 수의 침략이후 난공불락의 요새지로 알려져있었기 때문이였다. 당태종이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새로운 공성무기를 총동원시켜 성곽을 무너뜨리고 성안으로 불화살공격을 가하였다. 료동성안의 고구려군민들은 끈질기게 버텼지만 1만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10일만에 료동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료동성의 함락으로 료동반도에 길게 형성되였던 전선은 안시성으로 압축되였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였으나 성주 양만춘과 고구려군민들은 당군의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태종은 하루에 5∼6회씩 성을 공격하는 온갖 무기들을 앞세우고 60여일간 계속 공격하였으나 끝내 안시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하였다. 당군은 성안을 공격할수 있는 흙산을 쌓기도 하였으나 이 흙산마저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9월에 접어들자 추위와 군량부족을 견디지 못한 당태종은 마침내 안시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당태종은 중국으로 돌아가 "위징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당태종은 그 후에도 두차례나 고구려 공격을 계속하였으나 그때마다 격파되였고 649년 당 태종이 죽음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당의 전략은 단기결전의 정면공격으로부터 장기전을 통한 우회공격으로 수정되였다. 이에 따라 당은 고구려 남쪽의 백제를 먼저 치는 우회작전을 계획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