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9. 고구려 수나라와 싸우다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09-24 15:14:48    조회: 88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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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9.jpg589년, 수가 강남의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국통일을 이루자 고구려는 즉각적으로 이에 대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통일왕조의 압력이 당연히 예상되였기때문이였다. 병기를 수리하고 곡식을 비축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인 무기기술자를 데려와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고 수나라의 사신에 대해서는 고구려를 정탐하지 못하도록 한적한 곳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움직임을 눈치챈 수문제는 고구려에 대하여 "료하가 넓으면 얼마나 넓겠는가. 어찌 장강(황하)에 비하리오. 한 장군이면 충분할것을 어찌 많은 병력까지 필요하겠는가."라는 국서를 보내여(597) 고구려를 협박해왔다. 

량국간의 이러한 긴장상태를 깨고 선제공격을 감행한것은 고구려였다. 이에 맞서 수문제는 30만의 륙, 해군을 편성하여 역습을 가해왔다. 이 1차침략의 결과는 중국측기록에 의하면 륙군은 홍수때문에, 해군은 폭풍때문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10중 8, 9명이 사망한것으로 되여있지만 사실은 전투에 의한 패배였다. 군량을 운반하던 해군이 먼저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한 후 보급품을 받지 못한 륙군도 버티지 못한채 뒤따라 패배한것이였다. 이후 고구려를 두려워한 수문제는 다시 섣불리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하였다. 

한동안 평온이 유지되였던 량국간에 다시 전운이 감돈때는 수양제가 즉위한 이후였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한강류역 점령이후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협공하는 형세였으므로 고립되였던 신라는 수에 접근하고 있었다. 한편 신하로 복속하기를 요구하는 수양제에 맞서 고구려는 돌궐과 동맹을 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에는 수-신라의 동서 진영과 돌궐-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남북진영이 팽팽히 맞서는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수양제는 5년간의 전쟁준비를 거쳐 드디어 고구려 침략을 개시하였다(612). 좌우 12군씩 24군으로 편성된 수의 침략군은 총 병력이 113만 3800명이였다. 군량과 병기운반자는 그 숫자의 두배에 달하였다. 하루에 1군씩 출발시켜 40일만에 출동이 완료되였고 군대의 행렬은 960리에 걸쳤다. 중국 력사책인 "수서"는 "고금이래 군사출동의 성대함이 이같은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엄청난 수의 침략에 맞선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중심으로 세밀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고구려의 작전의 핵심은 전선을 축소시키는 것이였다. 벌판에서의 정면 승부는 절대로 피하고 성을 중심으로 수비전을 폄으로써 수의 대군이 위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말자는 것이였다. 이를 위해 고구려는 적에게 량식이나 말먹이를 빼앗기지 않도록 모든 백성을 성안으로 피난시키는 "청야(淸野)전술"을 폈다. 

이같은 고구려의 작전은 적중하였다. 료하강변의 전략 요충지인 료동성은 전쟁 개시 이틀만에 수의 군대에 포위당하였다. 그러나 료동성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함락되지 않았다. 수양제가 직접 공격을 지휘하였지만 4개월이 넘도록 료동성은 요지부동이였다. 수양제가 계획하였던 속전속결 전략은 료동성에서 무력화되였다. 

이에 수양제는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별동부대를 급히 평양으로 출동시켰다. 이때 4만의 수의 해군은 대선단을 이끌고 이미 대동강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륙군의 평양공격이 지체되자 해군 단독으로 성급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건무(뒤에 영류왕)가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대패당하였다. 이에 따라 평양에 당도한 수의 별동부대는 보급품을 공급받을수 없게 되였다. 

한편 별동부대를 상대한 을지문덕은 계속하여 적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폈다. 적군이 들어오는 길목마다 미리 백성을 성으로 옮기고 식량을 감추고 우물마저 메워버렸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번 모두 져주면서 적군을 지치게 하였다. 이윽고 별동부대가 평양성 외곽 30리에 도달하였을 때 우중문을 희롱하는 유명한 을지문덕의 오언시가 전달되였다. 

신묘한 그대의 작전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하였다. 
전쟁에 승리한 공 이미 높으니, 
만족한 줄 알았다면 그만 두기를 원하노라. 

보급품이 끊긴 상황에서 사태의 심각함을 뒤늦게 깨달은 우중문은 급히 퇴각명령을 내렸다. 이때를 기다린 고구려군은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살수(청천강)에서 별동부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30만의 별동부대 군사중 살아서 돌아간 병사가 2,700명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에 전쟁에 지친 수양제는 우문술 등을 쇠사슬에 묶어 귀국명령을 내렸다. 이를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수양제는 이후에도 두차례나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오히려 전쟁에 대한 백성의 불만이 높아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남으로써 결국 당에게 나라를 빼앗겨 멸망하고 말았다(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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