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7. 신라 한강류역을 차지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09-24 15:13:36    조회: 685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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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7.jpg내물왕이후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 시달린 신라는 5세기 눌지왕(재위 417~458)때 백제와 군사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고구려의 간섭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나-제동맹을 통하여 저지한 신라는 6세기에 들어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였다. 

지증왕(재위 500~514)은 주군제의 지방행정구역을 마련함으로써 부족의 자치권을 약화시켜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를 실현하는 한편 왕권강화를 통하여 "왕", "신라" 등 새로운 호칭을 사용했다. 

법흥왕(재위 514~540)은 부족적인 토속신앙의 저항을 뿌리쳐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사상의 중앙집권화를 기하였고 율령을 제정하여 통치체계를 정비하였으며 새로이 설치된 병부를 통하여 병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지증왕, 법흥왕때의 체제정비는 진흥왕(재위 540~576)시대의 정복적 팽창을 가져 왔다. 7세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기를 거쳐 18세부터 정치일선에 나선 진흥왕은 놀라운 정치,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화랑도를 개편하여 국왕에 직속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사정부(감찰 기관) 등을 설치함으로써 관리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국왕중심의 집권체제를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사업이 추진되였다. 

그러나 진흥왕의 정복정책은 6세기에 들어 심각하게 전개된 고구려의 내분에 힘입은바가 컸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에서 새로이 일어나는 돌궐에 대한 방어때문에 남쪽경계를 철저히 하지 못하였을뿐만 아니라 왕위계승을 둘러싼 귀족의 내분때문에 대외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하였던것이다. 

이같은 상황을 리용한 진흥왕은 백제 성왕의 고구려 공격에 협조하여 백제가 한강류역을 되찾자 백제의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한강류역을 빼앗아 버렸다. 한강류역의 획득은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던 신라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강류역의 비옥한 평야가 가져다주는 인적, 물적자원과 한강을 통한 수송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서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가 트이게 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사이에 신라가 위치하게 됨으로써 백제와 고구려의 신라협공이라는 삼국간의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만들기도 하였다. 중흥을 꿈꾸던 백제 성왕의 기세를 꺾은 진흥왕은 고구려의 함경도 남부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쳤고 가야마저 완전히 복속시킴으로써 국력을 크게 떨칠 수 있었다. 진흥왕의 위대한 령토팽창의 업적은 그가 세운 4개의 순수비와 단양 적성비가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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