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5. 고구려의 전성시대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09-24 15:12:27    조회: 94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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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5.jpg태조왕이후 고구려가 당면한 과제는 중앙으로 끌어올린 부족대표세력들을 약화시키는 문제와 그들을 통한 간접적인 지방통치방식을 어떻게 하면 국왕의 직접지배방식으로 바꾸느냐에 집중되였다. 

이같은 과제의 해결을 꾀한 이가 2세기 후반 고국천왕(재위 179~197)이였다. 고국천왕은 먼저 절노부를 왕비족으로 선택하여 계루부왕실의 지지기반을 넓혀나갔다. 이러한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부족단위의 중앙5부체제를 행정구역성격의 5부로 개편하였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직접 지배를 시도하였다. 

을파소를 등용하여 진대법을 실시한 목적도 가난한 농민이 귀족의 노예로 몰락하는것을 막으려는데 있었다. 산상왕(재위 197~227)이후부터 정착된 고구려의 왕위부자상속도 이러한 고국천왕의 정치적 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할수 있다. 

중앙집권화를 통한 국력의 강화는 고구려의 대외팽창정책을 가져왔다. 이미 태조왕때 옥저를 복속하는 등 동쪽방향으로의 정복사업을 추진하였던 고구려가 서쪽으로의 본격적 팽창을 시도한것은 3세기 동천왕(재위 227~248)때부터였다. 중국이 유비, 조조, 손권의 삼국 시대로 분렬된 틈을 노린것이였으나 동천왕의 시도는 위나라 관구검의 역습을 받아 실패하였다. 

관구검의 침략이후 위축되였던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다시 불을 당긴것은 4세기전반 미천왕(재위 300~331)이였다. 중국의 분열이 5호 16국시기로 접어들면서 낙랑군에 대한 중국 세력의 지배가 약화되자 미천왕은 전격적으로 이를 점령하였다(313). 고조선의 멸망이후 중국에게 빼앗겼던 대동강류역을 실로 400여년만에 되찾은것이다. 

그러나 계속된 고구려의 팽창정책은 순탄하지 않았다. 서쪽의 선비족(전연)의 침략에 시달리던 고국원왕(재위 331~371)이 급기야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평양전투에서 전사한 것이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팽창정책은 전면 수정될수밖에 없었다. 

4세기후반 소수림왕(재위 371~384)은 팽창정책을 중단하고 국력을 재충전하는 대대적인 체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소수림왕은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과 평화관계를 수립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므로써 부족적인 분렬을 극복하여 국민의 사상적통일을 꾀하였다. 또 태학을 세워 새로운 인재등용의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새로운 관료층을 확보하였고 율령을 제정하여 국왕직속관료조직을 확대함으로써 대가(종래의 부족장)들이 독자적인 관리들(사자, 조의, 선인)을 거느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소수림왕의 개혁은 뒤를 이은 광개토왕, 장수왕때에 펼쳐진 고구려 전성시대의 바탕이 되였다. 

5세기는 고구려의 시대였다. 뛰어난 전략가의 자질을 갖춘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의 팽창을 마무리지어 료동지방을 완전히 차지하였고 동북쪽의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 한강이북까지 진출함으로써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령토를 지배하였다. 만주 통구지방에 남아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비는 광개토왕의 위대한 정복의 업적을 전하여 주고있다. 

이같은 광개토왕의 위업은 장수왕(재위 413~491)에게 계승되였다. 장수왕은 남북조로 정리된 중국의 정세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두 세력을 적당히 견제, 조종하면서 고구려의 국력을 키워나갔다. 장수왕은 평양성으로 천도함으로써(427) 평양출신의 신진관료를 등용하여 국내성의 옛 귀족세력을 약화시켰을뿐만아니라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한강이남의 아산만에서 영덕까지 령토를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붙잡아 죽임으로써 고국원왕의 원한을 풀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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