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1. 주몽이 나라를 세우다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09-24 15:09:26    조회: 1,003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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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의 발단은 부여족의 분렬과 이동에서 비롯되였다. 

"부여왕 해부루가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 지내며 후계자를 구하였다. 해부루가 근심에 차서 산책하던 중 타고 있던 말이 곤연이란 련못에 이르러 큰돌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옮겼더니 거기에 어린아이가 누워있었다.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였다. 해부루는 하늘의 뜻임을 알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태자로 삼고 금와(金蛙)라고 이름지었다. 후에 국상(國相) 아란불이 하늘의 뜻임을 전하며 동남쪽 가섭원으로 나라를 옮길것을 건의하였다. 해부루는 가섭원에 새로이 도읍을 정하고 동부여라고 하였다. 해부루가 동부여로 나라를 옮기자 옛 부여 땅에는 범상치않은 한 사나이가 나타나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그 곳을 다스렸다. 그 사나이가 해모수였다."  ---- "삼국사기" 

sanguo1.jpg"동부여에서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금와는 사냥에 나섰다가 백두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라는 녀인을 만났다. 유화는 하백(물을 다스리는 신)의 맏딸이였는데 해모수의 유혹에 빠져 허락도 없이 혼인하였기때문에 하백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 그곳에 살고 있었다. 금와는 이상히 여겨 유화를 대궐로 데려왔다. 유화의 몸에는 항상 햇빛이 따라다녔다. 얼마후 유화는 태기가 있더니 큰 알을 낳았다. 놀라고 당황한 금와가 알을 내다 버리려고 하였으나 돼지들은 이를 피하고 온갖 새들은 날아와 깃털로 감싸주었다. 이 알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고 불렀다. 영특하고 비범한 주몽에 대하여 금와의 일곱 아들들은 질투를 느껴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권유를 받아 오이, 마리, 협부 등 3인의 부하와 함께 도망쳤다. 그들은 엄호수를 신통하게 건너 모둔곡에서 재사, 무골, 복거 등을 만나 합류하고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라고 하였다. 왕은 동가강 상류 비류국의 송양과 다투어 항복을 받았다."  ---- "삼국사기"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므로 주몽은 천제의 손자, 하백의 외손자로 된다. 

주몽의 건국설화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성장하여 자기 세력을 키운 후 졸본(압록강 중류 동가강 류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몽의 세력은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미리 정착하였던 예맥의 약소 세력을 포용하였고 졸본지역의 토착 세력인 송양의 비류국(소노부)을 통합하면서 더욱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알수 있다. 

일찍이 동가강 류역은 고조선이 멸망한후 한의 군현인 현도군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이였다. 그러나 현도군은 기원전 75년경 토착 세력의 반발로 료동 지방으로 옮겨갔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미 고구려의 건국 이전부터 토착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가 고구려에 의해 통합된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성장은 국가 체제를 중앙 집권적 형태로 변화시켜 나갔다. 주몽의 건국이후 상당 기간 동안 계속된 부족 연맹체 시기에는 각 부족이 자기 지역에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부족장들이 왕과 똑같은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두었다는 사실은 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족 독자적으로 중국의 한과 교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사회내에서 부족 서로간에 통합이 진행되여 5개의 큰 부족으로 정비되면서, 왕족인 계루부는 다른 4개 부족의 자치권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부족장의 대외 무역권과 외교권을 빼앗아 버렸다. 

이에 따라서 4개의 부족장 세력은 점차 중앙 귀족으로 전환되여 갔고, 이들이 중앙의 5개 지배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앙의 5부 체제의 성립은 태조왕(재위 53~146) 때 이루어졌다. 이것은 부족 련맹체적인 국가 체제가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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