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4. 고조선의 멸망과 기타 부족의 건립

작성자: 최고관리자님    작성일시: 작성일2015-09-24 15:06:53    조회: 794회    댓글: 0
ls_title_hanshi_04.gif

b_arow_06.gif고조선의 멸망
한편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는 무제때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성장하였다. 흉노를 격퇴하고 베트남을 정복하였으며 서역과의 교역을 위한 비단길을 개척한것도 무제때의 일이였다.

guchaoxian4.jpg고조선의 우거왕은 중계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한나라가 한강 이남의 진국과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고조선이 강력해지자 불안을 느낀 한무제는 기원전 109년 수륙 5만의 병사로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완강한 저항으로 한의 침략군을 격퇴하였다. 초반전부터 패배한 무제는 고조선을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은 이에 굴하지 않고 버텼다.

한나라는 또다시 침략하여 왕검성을 포위하였으나 고조선의 저항은 여러달 계속되였다.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한무제는 고조선의 지배층을 매수하여 분열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결국 고조선의 지배층이 분열되고 일부가 적에게 투항하였다. 또 우거왕이 이들에 의해 살해되였다. 그러나 고조선 사람들은 대신 성기의 지휘아래 수도인 왕검성 방어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성기마저 살해되고 왕검성이 함락되였다. 기원전 108년, 한의 침략에 맞선 고조선은 지배층 내부의 분열에 의해 멸망한것이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은 고조선의 옛 땅에 4군을 설치하고 직접 통치하였다.

b_arow_06.gif부여의 건립
부여는 북만주의 송화강(쑹화강) 류역의 넓고 비옥한 평원에서 성장하였다. 시조 설화에 의하면 부여는 아마도 더 북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그곳에 정착한것으로 보인다.

농경과 목축을 하며 여러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던 부여에서는 철기 문화가 전파되면서 족장 세력이 성장하게 되였다. 이들 족장은 “가”라고 하였는데, 각기 말, 소, 돼지, 개 등 가축의 이름을 붙여서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으로 불리었다. 이 이름을 통해서 부여는 목축을 중시하는 사회였음을 알수 있다.

부여는 늦어도 1세기 이전에 대족장이 왕을 칭할만큼 초기 국가로 그 세력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왕권은 그다지 강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여러 “가”의 세력은 강하게 오랫동안 유지되였다. 따라서 홍수와 한발로 인하여 흉년이 들면 그 책임을 왕에게 돌려서 왕이 쫓겨날만큼 여러 가의 세력이 컸다. 왕위는 적자에게 계승되였으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여러 가가 의논하여 왕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b_arow_06.gif기타 부족의 건립
한편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류역은 평야가 없는 산골짜기이기는 하나 대륙으로부터 철기 문화가 전래되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지역에 부여로부터 망명한 주몽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였다. 이 지역은 농경만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수 없었으므로 정복사업을 통해 해결할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말타기, 활쏘기 등 강건하고 정복적인 기질을 지니게 되였다. 훗날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것은 이러한 기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함경도, 강원도의 동해안의 연한지역에서도 여러 부족집단이 성장하였다. 지금의 함흥 평야를 중심으로 한 북부의 부족사회를 통틀어 옥저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원산 부근을 중심으로 한 동부 동해안 지역의 부족 사회를 동예라고 한다. 이 지역은 동해안에 치우쳐 있어서 대륙의 철기 문화의 수용이 그만큼 늦었다. 따라서 부여나 고구려에 비하여 그 문화발전단계가 훨씬 뒤져서 일찍부터 고구려 세력의 압력을 받을수밖에 없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